서강대학교의 가장 영예로운 기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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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아브레일 작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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장애를 이유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,
그런 의식이 희미했던 1970년대의 대한민국에는
공공연히 장애인을 차별하곤 했다.
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와
오른손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
자라나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.
중학교마저 체력장 점수를 모두 포기한 채
오로지 필기점수를 통해서만 합격할 수 있었지만,
고등학교를 졸업한 1971년에는
더 큰 시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.

안 돼!!!
당시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들이
장애인에게 입학시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아서
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갈 수가 없던 것이다.
심지어 아버지가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장왕록 박사였고,
아버지의 절친인 총장에게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
'여러 교수들이 찬성하지 않을 것'이라며 거부당했다.
그렇게 시험을 볼 수 있는 학교를 찾아다니던 부녀는
서강대학교 영문학과의 학과장이었던
브루닝 신부를 찾아가게 된다.
(*서강대학교는 예수회가 1960년에 설립한 학교이기에
초기에는 예수회 신부님들이 교수직 등의 중책을 맡았다)
아버지는 똑같이 딸의 사정을 설명하며
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는데...
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?
당연히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!
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?
당시 브루닝 신부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지
'경악하는 눈빛'으로 말했다고 한다.
그렇게 제롬 브루닉 신부의 예외적인 허락으로
장영희는 서강대학교 영문학 학/석사를 받을 수 있었다.
신부님이 아버지를 '정신나간 바보'처럼 봤다고 하셨어요.
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보였다고도 하셨어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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